‘바비 눈에는 엄마만 벌거벗고 있었고, 폼포이는 평소 여자들을 바라보는 특유의 음흉한 시선으로 천천히 엄마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바비는 엄마의 알몸을 봤다. 폼포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엄마가 폼포이의 시선에 반응했다. 실룩거리고, 술렁이고, 살짝 밀치고, 파르르 떨었다. 바비는 안으로 들어가 장롱에서 아빠 총을 꺼낸 뒤 다시 마당으로 달려가 폼포이 모렐에게 총을 겨누었다’
필리핀의 복잡한 역사와 문화적 정체성을 탐구하며 열대 지방 특유의 강렬한 분위기 속에서 펼쳐지는 매혹적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1950년대부터 60년대 닉 호아킨의 단편 모음집 ‘열대 고딕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열대 고딕 이야기’의 저자 닉 호아킨은 필리핀 사회에서 문학의 상징이자 자체로 꼽힌다.
무엇보다 그의 단편집은 단순히 과거를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고딕 성당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를 세우듯 필리핀의 독특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아름답고도 섬세하게 그려냈다.
특히 ‘열대 고딕’이라는 독창적인 장르는 초자연적인 요소와 현실적 고뇌가 뒤섞이며 필리핀이라는 복잡다단한 배경 속에서 독자들에게 진한 여운을 남긴다.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욕망, 두려움, 그리고 희망을 정교하게 풀어내며 필리핀 역사의 흔적과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애틋함을 담고 있는 ‘열대 고딕 이야기’는 각각의 단편을 통해 독특한 인물과 극적인 서사들이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경험을 선사하고 독자들은 거울 속에서 과거를 응시하듯 필리핀의 민족적 기억과 자신만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유도한다.
닉 호아킨은 작품 속에서 종교, 전통, 사랑, 가족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식민지 시절의 상처와 민족적 자부심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어 필리핀이라는 국가의 고유한 정체성을 탐구하며 자신이 창조한 고딕적 풍경은 독자들에게 마치 꿈속을 걷는 듯한 황홀감과 함께 때로는 인간의 어두운 면과 마주하게 한다.
‘열대 고딕 이야기’는 단순히 필리핀 문학의 걸작을 넘어 세계 문학사에서도 빛나는 작품집으로 각 단편이 선사하는 심오한 주제와 아름다운 문장은 독자들에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감동과 깨달음을 안겨줄 것이다.
한편 닉 호아킨은 필리핀 대표 소설상인 해리스톤힐상 제정 첫해인 1961년 첫 수상자에 이름을 올린데 이어 ‘필리핀의 퓰리처상’이라 불리는 돈 카를로스 팔랑카 기념 문학상을 세 차례 받았다. 이 외에도 1976년 ‘필리핀 국민 예술가’로 선정되는 영예를 얻었고 1996년에는 ‘작가로서 60년 동안 필리핀인의 몸과 영혼의 신비를 탐구한 공로’로 라몬 막사이사이상도 수상했다.
이에 핀리핀 사회를 넘어 한국을 찾은 닉 호아킨은 ‘열대 고딕 이야기’이라는 특별한 이야기를 통해 열대의 고딕 세계로 독자들을 끌어 들이고 있다. 한국 독자들에게 전하는 필리핀 문학의 정수를 ‘열대 고딕 이야기’를 통해 경험해 보자.